글루미 선데이
2007년 9월 11일 화요일
coverklein.jpg나는 오랫동안 독일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관객보다는 평론가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같이 건조하고 불친절한 것이 나의 취향에 맞지 않았고, 또 보고나선 어딘가 석연찮은 구석이 꼭 남아서 내가 무엇을 놓친 것은 아닐까 늘 찜찜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근래에 정말로 내 마음에 딱 드는 독일 영화를 발견했다. 내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내가 쓴 것처럼, 내가 꼭 쓰고 싶은 소설처럼 내 마음의 떨림이 공명하는 영화였다.

쉬벨 감독의 '사랑과 죽음의 노래 - 글루미 선데이(슬픈 일요일)'는 2000년에 제작되어 10개의 상을 받았지만 시끌벅적하게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명작이다.

영화는 카메라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의 스카이라인을 서서히 훑는 것으로 시작된다. 강변의 건물에 우리 눈에 낯익은 엘지의 로고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영화의 무대가 동서구의 장벽이 무너진 이후인 오늘날임을 알 수 있다.

싸보 레스토랑 앞에 몇 대의 검정색 벤츠가 줄지어 도착하고 메니저는 깍듯하게 귀빈을 맞아들인다. 독일의 저명한 기업인 한스가 80살 생일을 맞아 그가 젊은 시절에 즐겨 찾던 단골 레스토랑으로 먼 길을 찾아온 것이다. 한스는 자신이 예전에 좋아하던 요리를 음미하며 밴드에게 '그 노래'를 부탁한다.

'그 노래'를 들으며 감상에 젖는 한스의 눈에 한 여인의 흑백사진이 들어온다. 피아노 위에 놓인 사진을 보고 일어서는 순간 그는 갑자기 휘청거리며 쓰러지고, 그 바람에 옆에 앉은 부인의 진주목걸이가 끊어져 산산히 흩어지며 장내는 아수라장이 된다. 레스토랑 메니저는 '그 노래'의 저주 탓이라고 절규한다.

'그 노래' 글루미 선데이는 실지로 1930년대에 헝가리의 무명 음악가에 의해 작곡되었다. 방송을 타기가 무섭게 이 노래를 틀어놓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급증하며 유명해졌다. 이 노래에 정말로 어떤 기운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워낙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암울했던 시절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단순하고 무심한 듯 슬픈 선율은 자살의 열병과 함께 순식간에 전유럽으로, 바다 건너 미국으로 퍼져나갔고, 헝가리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선 이 노래가 금지되기까지 하였다.

이 노래가 궁금한 사람은  http://www.youtube.com/watch?v=N2fGWQKbX68 를 클릭하시기 바란다. 영화의 전반을 휘감아도는 선율이다.

흑백사진 속의 여인이 총천연색으로 생동하는 여인으로 겹쳐지며 관객을 60년 전의 싸보 레스토랑으로 초대한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일로나는 레스토랑의 주인인 라슬로의 애인이다. 라슬로의 탁월한 경영능력과 일로나의 상냥한 손님접대로 레스토랑은 날로 성황을 이룬다.

그러던 어느날 전속 피아니스트가 새로 들어온다. 젊고 우울한 음악가 안드라쉬, 그리고 성악을 공부하다 포기한 일로나는 첫눈에 서로 끌린다. 라슬로도 이를 눈치챈다.

욕조 안에 마주 보고 앉은 라슬로와 일로나. 그는 그녀에게  평생 그녀와 한 욕조 안에서 목욕하고 싶다는 말로서 청혼을 한다. 그녀는 그냥 이대로가 좋다며 거절한다.

일로나의 생일날, 레스토랑에선 생일축하 곡이 울려퍼지고 일로나는 모든 종업원들과 손님들의 축하를 받는다. 라슬로는 일로나에게 그녀가 늘 들고 다니는 꽃다발을 닮은, 파란색 보석이 박힌 꽃핀을 선물하고, 안드라쉬는 그가 그녀를 위해 작곡한 음악을 선물한다. 이때 단골손님인 한스가 끼어든다. 자기의 생일도 마침 오늘이며 내일은 부다페스트를 떠나 독일로 돌아간다며 기념으로 그녀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영화의 초반에 나오는 흑백사진이 찍어진다.

그날 밤, 라슬로, 안드라쉬, 한스 이렇게 세 남자와 일로나는 나란히 레스토랑을 나선다. 라슬로가 안드라쉬의 작곡을 칭찬하는 사이에 한스는 일로나에게 청혼한다. 자기는 사업가로 대성할 거라며 함께 독일로 가달라고 일로나에게 애원하지만 그녀는 한마디로 거절한다.

한스가 낙담하여 사라진 후 나머지 세 사람은 갈림길에 도달한다. 일로나와 안드라쉬는 가벼운 작별의 키스를 나누다가 걷잡을 수 없는 정열에 휩싸인다. 옆에서 지켜보는 라슬로를 인식하고 간신히 자제한다. 멀어져가는 안드라쉬의 뒷모습을 보며 일로나는 라슬로에게 안드라쉬를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라슬로는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존재라며 그녀가 편안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다정하게 말한다. 이렇게 그녀를 가운데 두고 두 남자는 각각 다른 길로 걸어간다. 몇 발자욱 혼자 걷다가 참지 못하고 문득 뒤를 돌아본 라슬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텅빈 밤거리의 외로운 가로등.

다리 위에 서서 실연의 아픔을 다스리던 라슬로는 역시 실연으로 자살을 기도하는 한스를 발견하고 구해준다. 이튿날 한스는 은혜 갚을 것을 약속하고 독일로 떠난다.

정열의 밤을 보낸 안드라쉬와 일로나는 다음날 아침에 시장에서 라슬로를 만난다. 라슬로는 사람은 누구나 몸과 영혼의 만족, 이 두 가지의 만족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말로서 일로나의 배신을 용서한다. 그는 일로나를 완전히 잃는 것보다는 반쪽이라도 얻는 쪽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그 와중에도 그가 감자값을 흥정하는 모습, 안드라쉬가 감자자루를 맞잡아들고 세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이 예견하듯이 그들의 삼각관계는 질투와 사랑의 밸런스를 맞추며 무난하게 유지된다. 라슬로의 도움으로, 안드라쉬가 일로나를 위하여 작곡한 글루미 선데이(슬픈 일요일)는 유명해지고, 두 남자 사이에도 우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글루미 선데이를 들으며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안드라쉬는 이 음악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는데 자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괴로워한다. 어느날 안드라쉬의 주머니에서 갈색의 작은 유리병이 발견되자 그는 심장이 멎는 약이라고 자백한다. 안드라쉬는 그가 일로나를 가진 동안은 자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라슬로가 그 약병을 맡아두기로 한다.

이차대전이 일어나고 헝가리는 독일군에게 점령당한다. 나치 장교복차림의 한스가 레스토랑에 나타난다. 한스는 유대인인 라슬로를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옛 친구들을 모욕하는 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다른 등장인물들에 비해서 처음부터 미성숙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한스는 갈수록 모순된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판단을 어지럽게 만든다.

결정적으로 한스가 안드라쉬에게 글루미 선데이를 연주하라고 명령하고 안드라쉬가 이를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긴장이 팽팽하게 흐르는 가운데 일로나가 나서서 글루미 선데이를 노래로 부르기 시작한다. 언젠가 그녀가 안드라쉬의 청을 거절하며 말했듯이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일로나는 안드라쉬의 목숨을 구하고자 했지만...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라슬로는 안드라쉬가 생전에 찾았던, 글루미 선데이의 메시지가 뭔지 알겠다고 말한다. 마지막 남은 한조각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일로나는 그렇다고 해서 꼭 가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살아 남아서 싸울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운다.

글루미 선데이의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욕조 안에 마주 보고 앉은 라슬로와 일로나. 갑자기 라슬로가 전축에 슬리퍼를 던지며 저 음악이 너무나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고 화를 낸다. 일로나는 그에게 평생 당신과 한 욕조 안에서 목욕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라슬로는 그녀를 외면하며 감자를 사러가야겠다고 일어선다.

영화를 감상하는 재미를 빼앗지 않기 위해선 긴장감이 고조되는 이 시점에서 글쓰는 재미를 희생하고 결과로 건너뛰는 수밖에 없다. 전쟁이 끝난 후 안드라쉬의 묘지를 찾은 일로나는 풀을 어루만지며 내가 너희 둘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너는 상상할 수도 없을 거라고 말한다. 오늘부터 레스토랑을 다시 열기로 했으니 나의, 아니 우리의 행운을 빌어달라며 그녀는 만삭의 배를 어루만진다. 그녀는 파란색 꽃다발을 들고 씩씩하게 걸어간다.

다시 시간을 뛰어넘어 장면이 바뀐다. 심장마비로 쓰러진 노인 한스를 담은 관이 나가자 레스토랑 밖에서는 신문방송의 취재경쟁이 요란하다. 한스는 성공한 기업인일 뿐 아니라 나치 치하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1000여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구해준 영웅이라고 칭송이 자자하다.

모든 차량들이 떠난 후 메니저는 레스토랑의 문을 단속하고 샴페인을 따서 두 잔에 따른다. 부엌에선 글루미 선데이를 허밍으로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주름진 손이 설거지를 하고 있다. 방금 한스의 고기에 꽂혔던 팔순 금박장식을 씻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색의 작은 병을 물로 헹구는 순간 메니저가 양 손에 든 샴페인 잔을 쨍그랑 부딪치며 말한다.

"생일 축하해요, 엄마."

아들과 포옹하는 노파의 하얗게 센 머리에는 파란 꽃핀이...



관객은 개인적으로 준비된 감성의 범위 안에서 영화나 소설을 제각각 이해하는 법이다. 내게 있어서 이 영화의 주제는 인간의 존엄성 즉, 인간의 품위이다. 이 영화는 전과정을 통해 내게 인간이 품위를 지키기 위하여 바치는 투쟁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품위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도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두 남자를 거느리는 일로나도, 둘이서 한 여자를 공유하는 라슬로와 안드라쉬도 어느 한 순간에도 인간의 품위를 잃은 적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기적이거나 치사할 수도 있는) 적나라한 면모를 가식 없이 인정한 후, 이에 따라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상대방에게 정직하게 구는, 공정한 게임을 벌였기 때문이다. 질투와 애욕을 밖으로 드러내는 순간에도 그들은 상대방이나 스스로를 모욕하거나 학대하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바탕으로 교류하는 이들 세 사람에게 제도적 개념을 들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구차스러울 뿐이다.

이들의 인간적 품위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도 허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자신의 마지막 품위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마지막 품위를 지키고자 자살을 계획했으나 이마저 허용되지 않은 사람도 마지막 순간에 고고한 자존심을 보였다. 살아남은 것이 부끄럽다는 말이 있지만 이 영화에서 홀로 살아남은 사람은 당당했다. 뿐만 아니라 살인조차도 당당했다.

품위를 지키는 인간에 대한 반대급부로 등장한 한스의 경우, 그는 남에게 호령하고 남의 생사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의 명령조차 내게는 마치 애원을 하는 듯이 구차스럽게 느껴졌다. 아마도 라슬로, 안드라쉬, 일로나의 경멸이 관객인 내게 이입되어서 그럴 것이다. 아마도 한스 자신도 그들의 경멸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한스는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하여 상대방이 나름으로 세워놓은 원칙을 깨도록 강요하는 것으로서 모욕을 준다. 나머지 세 사람은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반응하지만 늘 품위를 유지한다. 모욕을 받거나, 모욕을 견디거나, 죽거나, 살거나, 죽이는 등의 어떤 행위도 인간이 품위를 지키는 일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내게 희망을 준다. 품위를 지키는 일에는 아무런 공식이나 전제조건이 없다는 사실은 내게 '너도 할 수 있어'라고 용기를 준다.

감독은 관객들이 한스의 입장이 되어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한스에게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부여했다고 설명했다. 한스가 연출한 인간적 본성이 다른 세 사람이 연출한 인간적 본성과 다른 점은, 다른 세 사람의 잣대는 스스로의 양심이었으나 한스의 잣대는 세태였다는 점이다.

나치 동지들이 전쟁에 정신을 쏟는 동안 한스는 전쟁 후의 일까지 계산하는 치밀하고 똑똑한 사람이었고, 세태에 매끄럽게 적응한 덕분에 평생 좋은 점수를 받으며 살았지만, 세태에 의지하는 평가는 세태에 따라 흔들리는 평가이다. 양심이 아닌 세태를 자신의 잣대로 삼는 사람은 인간의 품위를 이익과 맞바꾼 사람이다. 인간의 품위를 스스로 저버린 사람은 스스로 경멸하며 살 수밖에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의 세태는, 나는 어떠한가? 가볍고 재빠른 적응을 실력으로, 인간의 품위를 무능으로 평가하지는 않는가?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서로 어떤 최면을 걸어주고 있는가?

이 영화에는 헝가리인, 유대인, 독일인이 등장한다. 인간의 전반적인 본성을 다루는 영화에서 누구 하나는 맡아야 할 어두운 면을 하필이면 독일인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한 것은 독일인 감독의 센스이다. 그의 역사관일 수도 있고, 이웃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다.

곳곳에 감춰져 있는 복선을 발견하는 것은 영화감상의 커다란 즐거움이다. 진주목걸이, 파란 꽃다발, 천사, 자전거 등등 여러 모티브가 마치 르코르뷔제의 모듈로처럼 영화전반에 탄탄하게 그물망을 치고 있다.

각 배우들의(특히 라슬로) 표정연기는 조용히 가슴을 찌르는 장면들을 군데군데 심어 놓았고, 우습지 않은 상황인데도 웃음이 터져나오고 따스한 마음이 드는 장면이 많았다. 나는 메니저의 얼굴이 세 남자 중에서 누구를 닮았을까 하는 경박한 호기심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혹시 한스를 닮은 건 아닐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쿵쾅거리고 탐정처럼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무는 것이 여간한 스릴이 아니었다.

이 영화는 실력 있는 건축가가 설계하여 보기도 좋고, 살기도 좋고, 가격도 적당한 건물처럼 감성과 이성을 두루두루 촉촉하게 적셔주는 종합예술이다.

글루미 선데이라는 제목으로 수출되어, 우리나라에도 한글자막의 DVD가 들어온 것으로 안다. 이로서 영화를 보면서 내가 생전 처음으로 강열하게 느꼈던, 이 영화의 자막을 내가 번역하고 싶다는 욕망은 물 건너간 셈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장히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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